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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문명의 개화에는 산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인더스강 그리고 황하 유역이다. 이들 지역이 문명을 발상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풍부한 수자원과 더불어 산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산림은 인류가 성취해 낸 문명발달의 단계 중 가장 첫 단계인 농업혁명을 완성시킨 숨은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화 이면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울창한 숲이 있었음은 수메리아 사람들이 남긴 인류 최초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열대림에서의 마야문명의 개화 이면에도 숲이 있었음을 마야문명의 발굴보고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인도의 인더스, 갠지스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이룩된 인류의 초기 문명에서도 문명발달의 견인차 역할을 한 숲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즉 인류의 문명 발상지의 배후에는 숲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숲이 없었다면 또는 연료나 건축재로서의 나무가 없었다면, 그리고 숲을 개간하여 얻은 기름진 경작지가 없었다면 농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이들 초기 문명도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산림
고대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산림의 역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룩해낸 수메리아 사람의 서사시인 길가메쉬에서 찾을 수 있다. 약 4,700여년 전에 지어진 수메리아의 서사시에는 길가메쉬가 그 자신의 도시국가 우룩을 건설하기 위해서 얼마나 울창하고 광대한지 그 넓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숲을 여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산림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 사막이나 준사막으로 변했다.
수메리아 문명의 초기 기록을 보면 BC3000년 경에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남부지역에서 밀과 보리의 경작이 시작되었으며 BC2500년 경에는 보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산림 파괴로 인한 토양 염분 상승으로 인해 밀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했고, BC2000년 경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메리아의 다양한 도시들이 발전하면서 경작지를 확장하고자 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비슷한 기후적 특징을 가진 열대나 아열대성 기후 지역에 위치한 마야문명과 인더스강 유역에서 꽃 피었던 인더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인더스 문명과 산림
인도의 경우, 인더스강 유역에서 고대 문화가 시작되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정착했던 고대인류는 이 지역 주변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경을 위해서 시행했던 지속적인 물 대기는 지하수면의 상승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 토양 내 염분이 많아져 종국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BC1900년 경에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문명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사원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굽는 데 필요한 연료재로 숲을 무분별하게 벌채한 결과였다.산림의 무분별한 벌채는 토양의 유실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토질 저하와 토양 내 염분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농업 생산성을 급격하게 저하해 승려나 지배계급을 더 이상 부양할 능력이 없어져 사회가 불안해졌고, 마침내 급격한 종말을 가져왔다. 지금부터 2,000년 전까지 통과하기 어려웠던 밀림지대였던 푼자브와 라자스탄 지방의 산림은 이제는 10만 제곱마일의 사막으로 변했다.
나일 문명과 산림
약 5,000여년 전, 이집트에서는 최초로 통일된 왕조가 나타났으며, 나일강 유역에서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BC5500년 경에 농업이 시작되었다. 나일의 농업 문명이 개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일의 농업 문명은 나무로부터 유래한 부식토가 필요한 유기질 비료를 제공하여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농산물과 수산물의 생산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농업 발전은 다른 국가와의 무역을 촉진하며 이집트를 최고의 문명으로 이끌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나일강 상류의 산림이 울창하게 남아있던 로마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로 인해 연료를 나일강의 갈대 대신에 상류 산림을 벌채해서 만든 숯에 의존하면서 산림의 파괴가 시작되었다. 특히 왕조의 권위와 신성을 지키기 위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건설은 수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수백 년에 걸쳐 계속된 피라미드의 건조에는 엄청난 목재가 소요되었고, 이는 산림 파괴로 이어졌다. 나일강 하류에 있는 산림의 경우 로마와의 전쟁을 위해 벌채하여 이용했다. 상류와 하류 지역에 산림이 파괴되면서 나일강 유역은 풍수해가 매년 계속되었고, 기름진 농경지들은 강수량의 감소로 인하여 염분 농도가 증가하여 불모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집트의 문화유적은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로마 시대 이후 700여 년 동안에 이집트는 지중해 연안을 제외하고 모든 국토가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다.
황하 문명과 산림
중국의 황하 유역은 중국 문명의 중요한 기원지로, 귀리의 재배를 시작으로 황하문명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산림 자체가 울창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처럼 숲이 송두리째 없었던 지역은 아니었고 오히려 소개된 상태의 숲이 있었다. 지속적인 산림벌채와 경작으로 산림은 소멸하고 농경지로 변했다. 지속해서 계속된 북서 고원지대의 산림벌채와 경작지 확대는 매년 황하의 범람을 초래했다. 황하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도 산림벌채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인구 증가와 함께 경작 면적의 확대가 필요해지면서 울창한 산림도 경작지로 변화했다. 즉 황하 유역과는 달리 중국의 중앙부나 남부지역은 울창한 산림지역이었지만 경작지로 변하고 말았다. 한편, 고비 사막은 예로부터 푸른 초지와 울창한 산림이 있던 곳이었으나, 침략에 대비해 산림이 불태워져 사막으로 변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와 발전은 산림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청나라가 개국하면서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이에 따라 경작지의 확대와 연료 소비가 증가했다. 이로 인해 산림은 서서히 갉아 먹히고, 20세기 초에는 겨우 대륙의 5% 미만의 숲밖에 남아나지 않게 된 것이 중국의 경우이다. 따라서 오늘날 12억 인구의 부양 이면에는 중국을 뒤덮고 있던 산림의 희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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