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자연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통찰을 느낀다. 나무의 생명력이 인간에게 주는 직관은 바로 그런 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 중 하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무를 응시하고 뿌리에서부터 줄기, 가지, 잎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생의 흐름을 통해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왜 우리는 나무 앞에서 멈춰 서는가. 왜 어떤 나무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통찰을 동시에 안겨주는가. 이 글은 미술과 생명의 시각에서, 나무가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직관적 감각의 정체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1.나무를 보는 감각은 시각 이상의 감각이다
회화 속에서 나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비유하거나 자연의 질서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특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무는 시간의 형상화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다. 나이테는 성장의 기록이고 굽은 줄기는 생존의 흔적이며 떨어지는 잎은 순환의 징후다.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생명의 연속성을 느낀다.
서양 미술사에서 나무는 종종 성서적 상징과 결합되어 생명의 나무, 선악의 나무처럼 인간의 도덕과 삶의 선택을 암시한다. 반면 동양화 특히 한국의 산수화에서는 나무가 단순한 자연 요소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 풍경을 투영하는 장치로 그려진다. 예컨대 겸재 정선의 산수도에서는 바람에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나무는 자연의 생명력이자 사람의 마음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나무의 형태를 통해 삶의 무게나 균형을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감각은 물리적 감각을 넘어선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가깝다. 미술치료에서도 나무 그리기는 자아 인식 성장 단계, 감정 상태를 읽어내는 데 널리 활용된다.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나무의 구조를 삶의 은유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를 본다는 것은 실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2.뿌리에서 가지까지- 생명의 구조와 인간의 경험
우리가 직관적으로 나무를 통해 감지하는 것은 형태 그 자체보다 그 형태 안에 내재된 구조적 의미다.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며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기반이다. 인간의 무의식과도 닮아 있다. 줄기는 시간과 함께 성장하며 뿌리에서 흡수한 생명력을 하늘로 밀어 올린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과 기억을 통해 내면을 확장해가는 과정과 겹친다.
가지는 선택과 확장의 상징이다. 하나의 줄기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듯 인간도 삶의 여러 갈래 속에서 끊임없이 결정을 내리며 나아간다. 가지는 때로 부러지기도 하고 서로 겹치기도 한다. 그러한 복잡함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나무의 생존 방식은 마치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조정하는 인간의 태도와 유사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나무의 성장에는 일직선이 없다는 점이다. 휘어지고, 굽어지고 때론 멈추고 다시 자란다. 이 비정형적 구조야말로, 인간 삶의 리듬과 가장 닮은 부분이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직선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실패와 후퇴, 방황과 복귀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나무를 볼 때마다 그런 진실이 시각적으로 전달된다. 이때 직관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렇다고 느껴지는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 비직선성에 민감하다. 일본의 꽃꽂이나 한국 전통 정원의 나무 배치는 모두 완벽한 대칭을 피하고 불균형 속의 조화를 추구한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며 생명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구조를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어떤 나무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깊은 울림을 주는 상징이 된다.
3.나무를 통해 직관하는 미술작품들
나는 종종 박수근의 그림 앞에 오래 멈춰 선다. 그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은 정면을 응시하는 두 여성 사이에 거대한 나무가 세워져 있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화려한 색도 없다. 그런데도 그 나무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그 나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곳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 사이의 관계와 세월의 흐름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20세기 후반의 설치미술 작품들도 자주 떠올린다. 조셉 보이스의 7000 그루의 참나무는 도시 공간에 실제로 나무를 심고 그것을 미술의 일부로 선언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나무를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사회 변화의 촉매로 보고 예술을 통해 생명력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려 했다.
더불어 나는 직접 나무를 그리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화가로서 나무를 그리는 것은 단순한 형태의 재현이 아니다. 나무의 에너지를 캔버스에 옮기는 행위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그리는 것이 가지인지 감정인지 성장의 흔적인지 모호해질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그림은 형태를 넘어서 감각과 연결되고 그것이 보는 이에게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된다.
4.나무 앞에서 깨어나는 감각의 복원력
삶이 빠르게 흘러가고 감각이 마모되는 시대에 나무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성장하고 있다. 도시의 회색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계절을 알려주는 존재 변하지 않는 듯하지만 매 순간 달라지는 생명체. 나무는 그 자체로 지속과 변화의 상징이며 우리에게 감각의 복원력을 상기시켜준다.
나는 직장생활로 지친 어느 날 집 근처 산책로에서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 멈춰 섰던 기억이 있다. 말없이 몇 분간 바라보다가 이상하게도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고 숨이 고르게 쉬어졌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무를 보는 그 행위만으로도 내 안의 무언가가 리셋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직관의 힘이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감각은 점점 평면화되고 있다. 스크린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감정을 텍스트로 표현하며 연결되었지만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이럴 때일수록 나무는 말 없이 우리에게 균형을 제안한다. 뿌리를 내리고 천천히 자라고 제 시간에 낙엽을 떨구는 생명의 리듬.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감각을 되찾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짧은 시간이지만 나무를 바라본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내 안의 나침반을 다시 맞추는 의식에 가깝다.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그 앞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곧 직관이다.